‘당신은 스스로의 결핍을 혼자서 치유할 만큼 상처로부터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마주하였을 때, 자신 있게 ‘네!’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상처’를 주고받으며 성장한다. 어머니에게 육체적 고통을 주지 않고, 세상으로 나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란 존재의 탄생 자체가 나를 사랑해주는 이의 ‘고통’과 함께 시작된다는 인간의 아이러니. 결국, 인간은 상처와 고통을 죽을 때까지 벗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 걸까.
<리노의 도박사>로 혜성같이 등장해, <부기나이트>와 <매그놀리아>를 거치며, 불과 서른도 되지 않아 ‘거장’으로 우뚝 선,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삼십 대에 <펀치 드렁크 러브>와 <데어 윌 비 블러드>를 만들며 인간의 본질과 관계를 무섭게 파고들더니, 이젠 더 이상 천재의 재기 발랄함에는 관심 없다는 듯, <마스터>라는 압도적인 영화로 우리 곁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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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조금의 결핍도 없이,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UN 총장도, 대영제국의 왕자도, 이슬람의 정신적 지도자도, 교황조차 혼자만의 돌고래 시간에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뼛속 깊이 자각하고 있지 않을까? 자신의 불완전함을 생생하게 자각하고 있는 이에게 <마스터>만큼 매혹적인 영화는 또 없을 것이다.
여기, 세계 2차 대전을 얼마 전에 경험한 ‘프레디’라는 사나이가 있다. 유년기의 가족 트라우마 덕에 안 그래도 결핍 많던 이 남자는 전쟁까지 경험하며, 정신적인 외상 후유증마저 생겨버렸다. 결핍과 상처로 얼룩진,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의 인간인 것이다.
어떤 여자를 만나도, 사진사로 성실히 일해도, 자신의 결핍과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이 남자는 어느 날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며 들어간 유람선에서 스스로를 ‘마스터’라 부르는 ‘랭케스터’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편안한 웃음과 여유로운 제스처, 자신을 꿰뚫어보는 듯한 화술과 깊이 있는 눈망울을 가진 ‘랭케스터’에게 매료된 ‘프레디’는 그를 자신의 마음속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랭케스터’와 교감하며, 과거의 트라우마와 마주하면서 자신의 결핍과 상처가 조금씩 치유되고 있다고 믿는 프레디.
그런 그가, 어느 날 자신이 믿고 따르던 ‘랭케스터’의 불완전함을 목격하게 된다. 자신의 결핍을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위대한 존재라고 인식한 ‘스승’도 실은 ‘인간’이기에 연약하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은, 방황하는 프레디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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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의 오프닝 첫 컷, 푸른 바다가 부감으로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배의 뒤편 난간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프레디)의 시선이다. 배는 어디론가 떠나가고 있는데, 영화는 배가 도착할 이상적인 어딘가가 아닌, 우리가 지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바다를 무심히 바라본다. 떠나온 ‘육지’가 아니라, 망망대해 어디든 비슷한 ‘바다’를 바라보는 시선이 <마스터>에서는 같은 앵글로 ‘세 번’이나 반복적으로 보인다.
모든 여행과 모험은 ‘귀국’하거나, ‘귀가’할 곳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의 ‘인생’이라는 여행에서 과연 우리가 돌아갈 곳은 어디란 말인가? 이미 우리는 어머니에게 고통을 주며 태어난 이상, ‘죽음’이라는 절대적 종착지를 향한 ‘삶’이라는 배에 탑승한 것 아닐까? 아무리 우리가 노력한다 한들 ‘자궁’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결국, 영화 <마스터>는 ‘프레디’라는 결핍되고 상처받은 인간을 통해, 돌아갈 곳 없는 자의 오딧세이아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 삶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태어나서 누구나 한 번쯤은 참된 ‘스승’이라 불릴만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품었던 여러 질문과 결핍을 충족시켜주는 스승을 어느덧 존경하게 되고, 배움을 지속한다. 그러나 “어느 날, 자신이 믿고 따르던 ‘스승’의 불완전한 모습을 목격하며 실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아닐까?”라고 영화 <마스터>가 우리에게 첫마디를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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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말이다. 설령 그렇다고 할지언정, 그 불완전한 ‘스승’에게 치열하게 배웠던 그 순간들이 과연 가치 없는 시간인 걸까? 실패한 연애, 실패한 모든 노력들이 우리 삶에서 전혀 쓸모없는 것일까?
<마스터>는 후반부 엔딩 장면을 통해, (그런 시간들이 객관적으로 ‘신흥 종교’의 억지 주장과 사기와 다를 바 없다 할지언정) 스스로 그 순간들을 통과하며 경험했던 노력들이 진정 진실되고 치열했다면, 어그러진 관계조차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살아가면서 누구든지 한 번쯤은 ‘연애’에 실패한다. 때론, 그것이 ‘우정’일 수도 있겠다. 바꿔 말해, 어그러진 관계가 단 하나도 없는 ‘인간’은 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다. 누구나 상처받으면서, 어느 정도의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비록, 실패한 연애라 할지언정, 연애하는 그 순간이 진실되고 치열했다면, 그(혹은 그녀)가 평생 못 볼 사람이 돼버렸다 할지언정, 그(혹은 그녀)가 남기고 간 멘탈과 취향은 나의 어딘가에 남아, ‘나’란 사람의 ‘정신과 영혼’을 확장시켜 주는 게 아닐까?
‘프레디’는 ‘랭케스터’와 이별하게 되었어도, 비록 ‘랭케스터’와 그의 아내가 주장했던 것들이 사기라 할지언정, 매 순간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내었기에 그 시간들이 거름이 되어 성장하게 된다.
비록, ‘프레디’가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에 등장하는 ‘오디세우스’처럼 본향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집적거린 자들을 응징한 것처럼 자기 생에 주어진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소하지는 못하지만, 살아가면서 새롭게 만난 관계를 작게나마 위로해 줄 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종착지를 향해 여행한다는 점에서, 누구나 ‘삶’이라는 배에 오른 ‘프레디’와 같은 뱃사람이다. 스스로의 결핍과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서, 자신을 근본적으로 치유시켜줄 수 있는 ‘연인’과 ‘스승’을 만날 가능성은 없다. 돌아갈 곳 없는 오디세우스인 우리가 먼저 만나야 할 것은 위대한 ‘스승’과 ‘연인’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상처와 비겁함이 아닐까? 정면으로 나의 비겁함과 마주할 때, 비로소 상처도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설령 나의 내면과 지금 당장 마주하지 않고, ‘스승’과 ‘연인’을 통해 결핍과 상처를 충족시키려 한다 한들, 그것조차 애초에 틀려먹은 일이 아니라, 스스로가 그 시간을 진정으로 치열하고 진실되게 보낸다면, 그 전과는 다른 인간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삶 아닐까?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서는 나에게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마스터>는 계속 이런 말들을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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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내가 본 ‘호아킨 피닉스’의 출연작 中 단 한편을 꼽으라면 단연 <마스터>다. 그가 그토록 위대한 배우인지 몰랐다. ‘프레디’역을 맡은 그는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연기’라는 매체를 통해서 선보일 수 있는 강렬한 에너지의 극한을 보여준다. 또, 그런 ‘호아킨 피닉스’의 에너지에 기죽지 않고, 여유롭게 받아치는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미친 연기는 ‘영화’라는 미디어가 공력 있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맛’으로 소비하는 콘텐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밀도 높은 시간을 선물해준다.
‘에이미 아담스’는 초, 중반까진 남자배우들의 불꽃 연기에 가려 존재감이 극히 미비하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제가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에 그저 밥숟가락 얹은 사람이 아니랍니다. 저도 여기에 있답니다!”라고 외치는 듯, 접하기 힘든 선명한 연기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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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깊어지고 깊어지는, 이 대체 불가능한 영화 창작자 ‘폴 토마스 앤더슨’의 세계가 어디까지 나아갈지 몹시 궁금하다. 이 남자, 데뷔작 <리노의 도박사>부터, 배우들의 연기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었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미쳤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찔하다. ‘호아킨 피닉스’라는 배우가 보여줄 수 있는 ‘연기 예술의 어떤 정점’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지금 당장 영화 <마스터>를 관람하기 바란다.
영화 관람이라는 행위가 줄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기쁨’과 ‘환희’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다. 6년 전인 2008년 봄에 개봉한 폴 토마스 앤더슨의 또 다른 걸작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맛본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폴 다노’의 신들린 연기를 잊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장담컨대 <마스터>에 만족할 것이다.
<마스터>는 영화가 단순한 ‘오락거리’로 소모되는 시대에, 여전히 ‘영화’라는 미디어가 ‘예술’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 믿는 사람이 만들어 낸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또 하나의 명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