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게 스탠리 큐브릭의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티븐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 제임스 카메론의 <어비스>, 로버트 저메키스의 <콘택트>, 자코 반 도마엘의 <미스터 노바디>,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 다음 자리에 와야 할 영화가 무어냐고 묻는다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앞선 영화 구루들의 마스터피스가 선사하는 장점을 조화롭게 모아놓으면 이런 작품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칠 때 치고, 빠질때 빠지는데다, 과잉 정서와 기름기마저 제거한 노련한 영화가 바로 <인터스텔라>다.
[식량 위기로 맛탱이 간 지구 구하기]라는 기본 뼈대를 동력 삼아 진행되는 <인터스텔라>는 스토리 구조 자체가 매우 어렵거나, 거대한 캐릭터 갈등이 있는 것은 아님에도, 169분 동안 여러모로 흥미로운 긴장감을 형성하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 긴장감의 6할 이상은 ‘한스 짐머’의 음악을 시의적절하게 활용하는 사운드 디자인이 큰 몫을 차지하는데, ‘정중동’으로 연출되는 장면마저, 다음 순간을 기대하며 화면에 몰입하게 만들어 준다.
고요와 웅장, 미세와 정적을 자유자재로 오가지만, 음악이 화면을 선행하거나, 스스로 돋보이려 하지 않으면서도, 조화롭게 어울리는 최고 수준의 사운드 디자인 솜씨를 선보인다.
때는 바야흐로 21세기 중반, 최고의 우주선 조종사 中 한 명이었던 쿠퍼는 NASA가 해체되는 바람에, 지금은 조용한 농가에서 싫어하는 농사를 억지로 지으며 살아가고 있는 가장이다. 우주를 동경하며, 늘 꿈을 꾸며 지냈는데, (인류의 식량난으로) 어쩔 수 없이 택한 지상에서의 삶은 그가 만족하며 지내기엔 재미가 없다.
바뀐 지구 환경에 맞춰, 이공계 브레인들은 더는 ‘의대’나 ‘공대’가 아닌, ‘농업 대학’으로 모여들고, 호시절을 누린 엔지니어들도 이미 한물간 신세로 전락했다. 식량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할 수 있는 건 ‘농부’라고 믿는 시대라, 쿠퍼도 아들 녀석이 농대로 갔으면 하고 바라지만, 그벽이 높기에 쉽지 않은 현실에 한숨을 쉰다.
그런 쿠퍼에게 유일한 낙이 있다면, 바로 사랑스러운 딸 ‘머피’다. 과학 지식을 가르쳐 주는 대로 쏙쏙 익혀버리는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 딸’머피’와 함께 하는 시간이 쿠퍼에게는 구원과 다름없다.
머피는 종종 쿠퍼에게 ‘유령’을 봤다며, 중력을 거스르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고, 쿠퍼도 다른 차원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그러던 어느 날, 머피가 자신의 방에서 좌표를 하나 발견하고, 쿠퍼는 길을 떠난다. 몰래 따라나선 머피와 함께 도착한 곳은 해체된 줄 알았던 NASA.
그곳에서 인류를 구원할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바야흐로, ‘웜홀’을 뚫고, 인류의 새로운 터전 찾기다. 황당무계하게도 NASA의 최고브레인 ‘브랜드’ 박사는 쿠퍼에게 우주로 떠나, 인류의 새 터전을 찾아주기를 부탁한다.
그리하여, ‘브랜드’ 박사의 딸 아멜리아를 포함해 몇몇의 동료와 떠나게 된 인류의 운명을 건 [우주 탐험]. 웜홀을 통과해 ‘우주 그 너머’ 인류가 새롭게 살 수 있는 행성을 발견해야 겨우 끝이 나는 프로젝트에 합류한 쿠퍼.
문제는 웜홀 너머 ‘새로운 행성에서 보내는 1시간’은, ‘지구에서의 7년’이기에, 사랑하는 가족(특히 딸 머피)에게 귀환하겠다는 약속을 한 쿠퍼는 최대한 빨리 행성을 탐구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런데 어디 무슨 일이든 계획대로 되는 게 있단 말인가!
쿠퍼 일행도 ‘이론’과 ‘실제’는 뼈저리게 다름을 인정하며, 실패를 거듭한다. 그렇게 우주에서 벌어지는 ‘쿠퍼 일행(+브랜드 박사의 딸 아멜리아)’의 이야기와 지구에서 다 큰 딸내미 ‘머피(+브랜드 박사)’의 이야기가 병행되며 보이는 작품이 바로 <인터스텔라>다.
그다음 이야기부터는 중요한 스포일러이기에 이곳에는 남기지 않기로 하겠다. 밀도 높은 중반부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당장 <인터스텔라>를 예매한 후, 극장에 가서 꼭 보시라고 추천드리고 싶다.
<인터스텔라>를 큰 그림으로 보자면,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을 쌍두마차 삼은 ‘우주 물리학 블록버스터’인데, 시퀀스 별로 실제 이야기가 작동되는 방식은 ‘심리학’ 더 파고들면 ‘인간관계학’에 가깝다.
자칫하면 마이클 베이의 <아마겟돈>이 될 수도 있었던 영화적 야심은 어느 순간, 차라리 신카이 마코토의 <별의 목소리> 장편 버전의 느낌이 들 정도로 인물간 ‘관계’와 ‘소통’에 초점이 맞춰지며, <인터스텔라>가 지향하는 영화적 비전이 어디에 있는지 비로소 분명해진다.
바로, 싱어송라이터 양양의 [2집 사랑의 노래] 5번 트랙 제목이기도 한, ‘정답은 사랑’이다. 현존하는 인류 中 최고의 스토리텔러인 ‘조나단 놀란’이 무려 4년 동안 물리학을 파고들며, 치밀하게 취재하며 만들어낸 [인류의 운명을 건 21세기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야심이 고작 ‘사랑’이라니…!?라고 당황할 수 있겠으나, 그게 그리 고작일 리가 없지 않은가.
예컨대 ‘우주 그 너머’ 어딘가로, 웜홀까지 통과하며, 시공을 초월해 이동하는 것도 숱한 과학 천재들이 모여, 먼 미래에야 간신히 이루어낼 너무나도 어려운 미션이겠지만,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진정으로 소통하며 ‘사랑’하는 것도 그 못지 않게 힘들다는 걸 <인터스텔라>는 증명해내고 있다.
먼 훗날, 정말이지 인류에게 식량난이 닥쳐, ‘우주 그 너머’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나서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사랑이라도 하고 볼 일 아니냐고 영화가 말을 건다. 인류의 운명을 걸고, 우주 그 너머를 개척하는 것만큼이나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 않느냐고, 엄청난 위기가 닥친 인류를 구원한 다음 또다시 시작해 볼만한게 바로 사랑 아니겠느냐고 <인터스텔라>가 한 번 더 말을 건다.
문명을 끊임없이 진화시킨 인류가 웜홀까지 통과해, 우주를 개척까지 하며 간신히 생존한 후, 도달한 무언가가 고작 ‘사랑하라!’ 라니…! [우주 액션 블록버스터]나, 경지에 이른 [심오한 철학]을 기대한 누군가는 불만이 있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하는 척’하거나, ‘외로워서’가 아닌, 진정으로 온 마음을 다해, 있는 힘껏 하는 사랑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간신히 통한 마음도 조금만 방심하거나, 노력을 게을리하면 금세 어긋나는 거 아니던가?
끊임없이 새로운 터전을 찾아 우주를 개척하는 것만큼이나, 섬세하고 조심스레 꾸준히 힘써야지 가능한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놀란형제’는 전 우주를 통찰하고, 시공까지 초월하며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아니, 그걸 말하고자 이토록 많은 제작비를 써야 했나요?”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놀란 형제의 이 비전 덕분에 23, 24세기는 되어야 인류中 소수가 간신히 맛볼 수 있는 차원이 다른 우주 경험을, 21세기 한반도(그마저 반으로 갈라진)에 사는 인간으로써 고작 만 원을 내고, 극장 의자에 앉아 대리 체험할 수 있었으니 그거면 충분치 않은가? 거기다 응축된 물리학 지식을 이토록 쉽게 학습까지 받을 수 있었으니, 이만하면 최고로 기쁘지 아니한가? 싶다.
우주를 배경으로 물리학이 토대를 이루고 있지만, 그럼에도 ‘인간관계’가 본질인 <인터스텔라>를 축약하자면, 결국, 인간의 삶이란…
‘나’라는 [행성]을 떠나, ‘인생’이라는 거대한 [우주]에서, ‘고난’이란 [웜홀]을 통과한 후, 함께 살아갈 ‘너’라는 새로운 [행성]을 찾기 위한 과정 아니던가.
놀란 형제는 그 웜홀을 찾으려면 “소리치고 저항하라, 분노하고 분노하라!”며, 쿠퍼 일행이 지구를 떠날 때, 브랜드 박사가 해준 말로 우리의 심장을 적신다. 꿈을 잃고, 체제에 마냥 순응하는 자는 새로운 행성을 찾기 힘들고, 설령 찾았다고 해도 ‘물이 넘쳐 땅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거나, ‘구름마저 얼어 있는’ 도저히 인간이 살 수 없는 땅일 가능성이 높다.
저항하고, 분노한다고 크게 달라지는 게 없을 수도 있겠지만, 아주 작은 시도라도 ‘이론’에 머물지 않고, 꾸준히 ‘실천’한다면, 인생이라는 우주에 ‘웜홀’하나 뚫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웜홀을 통해,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삶을 맛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새로운 행성에서또 다른 꿈을 꿀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믿고, 소리치며, 행동하며, 분노하고 싶다.
<인터스텔라>에 참여한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이런 169분을 만나기란 좀처럼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경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