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전역을 열흘 남기고, 김정일이 사망했다. 자유가 제한된 고립감에서 이젠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소소한 기쁨을 누리고 있던 터라, 그 뉴스가 아찔했다.
조금은 여유로워진 상병 때부터 고립감을 달래고자, 점호를 마치고 잠들기 전 1시간씩 독서를 했는데, ‘김정일 사망’이 터지고 난 뒤, 전역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바로,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이다>였다.
책 속에는 진영 시절부터, 군 복무, 가족 대소사 등 소탈하고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세속적 변호사로 살다, (부마항쟁 때도 가만히 있었는데) ‘부림 사건’을 만나면서 인권 변호사로 거듭나는 이야기와 선거에서 떨어질 걸 알면서도 불리한 지역에 출마한 사연, 국회의원 초선 시절의 에피소드 등을 흥미진진하게 다루고 있었다.
<운명이다>는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쓴 원고를, 지식소매상 유시민 선생님이 사후에 정리를 해서 출판한 책이었다. 고인의 측근이었음에도 서문을 객관적으로 쓰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였는데, 고인이 언제나 인권의 화신, 정의와 양심의 상징은 아니었고, ‘가족의 안녕’을 위해 세속적으로 살던 시절도 있었고, 청와대 시절에도 어쩔 수 없이 상대 진영과 거래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도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었다.
군대에서 읽은 80여 가지의 책 中 가장 추천하는 단 한 권을 뽑으라면, 늘 자신 있게 <운명이다>를 얘기했는데, 책을 읽으면서도, 그 이후에도 그 내용을 ‘스크린’을 통해 만날 수 있다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 자신’만 생각하면, 포기할 것은 포기하면서 소신 있게 살 수 있지만, ‘가족의 안녕’까지 생각하면, ‘자본’의 힘이 너무나 막강해진 이 시대에 늘 양심적인 선택만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을 하건 문명화된 곳에서라면, ‘자본’을 통해서 가치를 교환할 수밖에 없는데, 이때 행동의 제약을 풀어주는 것은 ‘시간의 양’이 아니라, ‘자본의 양’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는 있지만, 시스템이 당장 바뀌지 않는다는 가정하에서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역설적이게도 ‘자본’이 많아야 한다. 행동의 제한과 폭, 질이 그걸 통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자본’이 하나도 없는데, ‘시간’적인 여유가 많다고 해서 자유롭다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는 판타지에 불과하다.
그러한 상황인데도 한 가장의 ‘세속’적인 삶을,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다. <운명이다>가 좋았던 건, 그분이 처음부터 대단한 ‘정의의 화신’이나 ‘인권의 상징’이 아니라, ‘가족의 안녕’을 구하던 소시민. 또 그걸 위해 부단히도 돈을 벌어야 했던 한 인간으로서의 진솔한 전반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변호인>도 마찬가지였다. 주인공 ‘송우석’에게서 주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가족의 안녕’을 위해 정말 열심히 사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기에 좋았고, 세상의 모순 앞에서 뒤늦게 ‘인권’에 눈을 뜨는 (현실에서는 실천하기 쉽지 않은) 판타지가 있기에 좋았다. 그리고 그 판타지가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실’이어서 울림이 강렬했고, 눈물까지 났다.
1980년대를 다루고 있는데, 2013년으로 치환해도 메시지가 유효하다는 것에 움찔했지만, ‘가족의 안녕’과 ‘세속’을 어느 정도 포기한 분들의 용기와 양심이 있었기에, ‘지금 현재’가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가족이 어려워지면서까지 ‘사회적 정의’를 외칠 수 있을까?
나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러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든다.
모순적인 [사회 구석구석의 안녕]을 위해, ‘가족의 안녕’과 ‘개인의 영달’을 기꺼이 포기하신 분들이 있었기에, 늘 비판의 도마에 오르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라 할지라도, 그나마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감사하다.
‘삶’을 하루하루 경험하지 않고, ‘언론’만 보았더라면 올 한해는 과연 지금이 2013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모순적인 것이 많아 보였다. 언론을 통해 말도 안 되는 소식을 접하며, 조금씩 누적되어 쌓인 분노와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집단 치유의 경험]이 필요했는데, 영화 <변호인>은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다소나마 그걸 가능케 해준다.
<변호인>을 스크린에서 편히 볼 수 있게 해 준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필요한 시기에 나온, 너무나 귀한 콘텐츠다. 영화 한 편을 관람한다고 해서 세속을 벗어나기는 힘들겠지만, 적어도 오늘 밤만큼은 ‘안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