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당신의 영화편력은 어떤 감독으로부터 시작 되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왕가위’와 ‘이와이 순지’라고 대답할 것이다. 작품 속에 함의 된 것들을 섬세하게 느낄 틈도 없었던 10대 시절, 매혹적인 이미지의 향연을 펼쳐내는 그들의 영화에 난 그저 온 맘 다해 열광했다. 아마도 지금 시점에서 짐작하건데, 왕가위와 이와이 순지 작품들 속 감각적인 ‘이미지’도 이미지였지만, 그들이 영화에서 주로 다루는 소재와 주제가 내 마음을 시종일관 움직였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아비정전>, <중경삼림>, <타락천사> 등을 통해 현대인의 고독한 내면을 감각적인 영상에 담아냈던 ‘왕가위’는 후배 감독인 ‘엽위신’이 영화 <엽문>을 통해, ‘엽문’을 일제 치하의 불산에서 ‘무술’을 통해 지배 권력에 저항하는 영웅으로 (액션은 창의적이었지만 주제와 밀도의 측면에서) 단순하게 그려낼 때, 오히려 ‘엽문’에게서 대륙에서 홍콩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었던, 아픈 시대를 살아내야만 했던 ‘고독한 중국 근대인’의 전형을 발견해 낸다.
왕가위는 자신이 연출한 영화 <2046>을 통해, 엇갈리는 운명 앞에 마주한 미래의 ‘고독한 인간’을 그려냈다면, <일대종사>를 통해서는 옛 것이 사라지고, 새 것이 들어오는 ‘신구 교체’의 상황 속에서 과거의 소중함을 계승하려는 자들의 어찌할 수 없는 ‘고독’을 다루어내고 있다. 결국, <일대종사>는 <아비정전>, <중경삼림>, <타락천사>등 ‘현대인의 고독’을 다룬 왕가위 작품 세계의 프리퀄이자, 가장 본질적인 영화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엽문>은 소재만 ‘무인’일 뿐, 주인공이 어떠한 직업과 직종이라도 사실 크게 상관없는 작품이었다. ‘상해’에서 태어나, ‘홍콩’에서 ‘영화감독’으로 일가를 이룬 왕가위에게 ‘본토’와 ‘홍콩’의 관계와 역사를 정리하는 일은 자신의 작품이 다음 세계로 나아가는데 있어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그는 세상과 섞이지 않은채, 자신의 단련에만 관심이 있었던, 그러나 시대적 상황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륙에서 넘어와 홍콩에서 간판없이 ‘영춘권’을 전파했던 ‘엽문’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픈 시대를 관통하는 무인에게서 ‘대륙’과 ‘홍콩’의 역사를 관통하는 ‘고독한 근대인의 전형’을 읽어낸, 영화감독 왕가위는 자신의 모든 내공을 총동원해, 스크린에 그것들을 ‘시’적으로 수놓는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몇 번을 감탄하고도 이내 또 ‘아…!’하는 탄성이 나올만큼 근사한 영상의 맛을 <일대종사>는 우리에게 제공한다. 주제를 다루어내는데 있어 굳이 ‘무인’이 아니어도 되었지만, 과장 섞인 ‘강호무림’을 다룬 ‘무협지’의 세계가 증명하듯, ‘무예’는 많은 관객들과 소통하는데 무리가 없는 시각화시키기 좋은 재료다.
영화 속에서는 몇 번의 대결이 등장하는데, 단연 인상적인 두 가지 대결 장면을 꼽자면 북방 무술을 통일했던 영웅호걸 궁 대인의 혈육 ‘궁이’와 야망에 눈이 멀어 당대의 ‘일대종사’이자 스승인 궁 대인을 살해한 ‘마삼’과의 기찻길 결투와 자신의 아버지가 만인 앞에서 인정한 ‘엽문’과 ‘궁이’가 벌이는 에로틱한 실내 결투다.
인간은 ‘시/공간’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생’이라는 영화에서 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건 ‘공간’밖에 없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 생을 관통하며 일정하게 흐른다. ‘시간’은 ‘신’의 영역이지, 인간이 침범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러나, ‘영화’라는 예술 매체에서는 ‘시간’을 다루어내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엽문>을 감상하면서, 우리 시대 가장 뛰어난 영화 대가 중 한 명인 왕가위가 선보이는 ‘시간을 다루어내는 맛’을 체험한다. 그것을 한대 응축한 결정적 장면이 바로, ‘궁이가 벌이는 두 번의 결투’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찾아 온 ‘궁이’와 ‘마삼’의 대결은 기찻길에서 벌어진다. 기차역 플랫폼에 서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기차가 출발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차는 우리의 시야에서 저 멀리로 사라진다. 꽤 오랜시간 대결을 벌이는 듯한 ‘궁이’와 ‘마삼’의 결투에서는, 그러나 ‘기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등장하며 어디론가 향해간다. 사람은 어떤 것에 깊게 몰입하고 있을 때 ‘시간의 흐름’을 달리 느끼게 된다. ‘두 사람만의 시간’ 속에 갇히면 세상의 절대적 시간과는 다른 흐름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발 한번의 움직임, 손 하나의 동작이 ‘생사’를 결정하는 ‘무예 고수’들의 초식 싸움에서 절대적 시간으로는 ‘찰나’일지 모르나, 그 안에는 엄청난 함의가 들어있다는 것을 ‘왕가위’는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표현한다.
또한, ‘슬로우 모션’과 ‘반복 편집’을 통해 표현해내는 엽문과 궁이가 대결을 벌이는 장면의 에로틱함은 그 누구도, 어떤 ‘정사’ 장면에서도 표현하기 힘들었던 우아하고 격조높은 ‘두 사람 만의 시간’으로 우리를 데려 간다. ‘무협’의 세계에서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고, 고수의 대결에서 느끼는 희열은 ‘섹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남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든, 일생을 고독 속에서 자신의 단련에만 시간을 쏟았던 ‘궁이’와 ‘엽문’은 비로소, 자신과 비슷한 길을 걸은듯 보이는 서로에게 결투 속에서 호감을 느끼며, 깊게 관계한다.
시대가 후져서 ‘여성’이 도달할 무인으로써의 지위가 없던 ‘궁이’는 자신이 그토록 좋아했던 ‘무예’를 깊게 파고들어 사랑했던 ‘엽문’을 마음에 품게 된다. 그러나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엽문’은 가족도 있고, 가야할 길도 멀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죽는 날까지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럼에도, 서로를 알아 본 ‘두 사람만의 시간’은 일평생 잊지 못하고 그들의 마음 속에 깊이 남는다. 나 혼자만 이렇게 살아온 줄 알았는데, 그래서 그 누구도 나를 영원히 이해해주지 못할 줄 알았는데, 새롭게 만난 누군가도 이리 살아왔고, 그 존재가 나에 대해 진심으로 공감하며 호흡할 때의 느낌. 그것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고수들이 대결하는 두 장면을 통해 ‘시간의 함의’를 뛰어나게 묘사한 왕가위는, <일대종사>에서의 ‘엽문’을 통해, 단순한 일제강점기 ‘영웅담’이 되어버린 엽위신의 <엽문>에서 놓친 ‘근대의 함의’를 영화 전체를 놓고 표현해낸다.
‘마삼’이 숨을 거두기 전, ‘궁이’에게 전해준 궁 대인의 가르침은 “지나온 것들을 되돌아 봐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주성철 기자의 표현대로 ‘홍콩영화라는 문파의 일대종사’가 되어버린 ‘왕가위’가 좋은 재능을 상업성에만 몰두해 표현하고 있는 아까운 후배 감독 ‘엽위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서 있는 이 나라와 이 공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우리의 뿌리를 파고드는 작업. 그 속에서 어쩌면 우리는 지금의 나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마삼’에게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전해 들은 ‘궁이’는 오랫동안 품은 마음을 외면한 채, (하고 싶었던 무술을 더는 하지 않은 채) 위장한 시간을 보내다, ‘엽문’을 마지막으로 찾아가 고백한다. 그를 마음에 둔 적이 있었음을. ‘대륙’ 사람으로 ‘홍콩’에 건너와 야속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궁이’는 과거를 돌아봤을 때 자신이 가장 뜨거웠던 시간은 엽문과 무예를 겨루며 교감했던 바로 그 순간이었음을 담담하게 고백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장쯔이’가 출연했던 모든 영화를 통틀어, 최고의 연기를 맛보았다. 여장부로써 당당했던 초중반부의 ‘궁이’와 후반부 고백 장면의 ‘궁이’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같은 배우가 같은 인물을 연기하지만, 영혼의 색채와 농도가 너무나 다른 것이다. 두 장면에서의 장쯔이가 ‘궁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색채와 농도가 다른) ‘궁이’라고 느껴지기에 더욱더 아픈 순간을 극장에서 체험했다. 이미 다시 그 순간을 맛보기에는 저 멀리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자(엽문)에게, 자신의 ‘화양연화’를 고백하는 여자의 아픔. 두번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슬프고 슬픈 그 정서를 ‘장쯔이’는 완벽하게 표현해내고 있었다.
시대가 구리고 후져, ‘좋은 딸’, ‘좋은 아내’로써 살 수밖에 없었던 중국/홍콩의 근대를 왕가위는 시적으로 반복하며 표현해 낸다. 송혜교가 연기한 엽문의 아내 ‘장영성’은 자신의 욕망을 숨긴 채 그저 남편의 좋은 아내로써 한 평생을 덤덤하게 살아간다. 이와 대비되어 (마음 속 깊이 무술을 꿈꾸고 노력했지만) 결국 아버지에게 ‘좋은 딸’로 살 수밖에 없었던 ‘궁이’의 아픔은 스크린 밖으로 새어나온다.
‘달 위를 걸은 암스트롱조차도, 자신의 내면에는 일평생 가닿지 않지 않았을까?’라고 박민규 작가는 어느날 우리에게 질문했다. 스스로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대륙과 홍콩의 근대는 여성에게 자신의 내면세계를 사회적으로 극대화할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다. 그토록 부조리한 함의를 이토록 ‘시적’으로 압축하여 눈부시게 표현해 낼 수 있는 ‘왕가위’라는 창작자를 가진 홍콩영화계가 부럽다.
‘영화의 운동성’, ‘시각매체의 시적 표현’은 일찍이 이명세 감독님이 도달했던 세계였다. <형사 Duelist>에서 보여준 이명세 감독님의 ‘영상 시’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첫사랑의 향수’와 아련함을 잊지 못하는 기질적 한계로 인해, 시대까지 꿰뚫어내는 데는 관심이 없으셨던 것 같아 조금은 아쉬웠다.
일평생 인간의 고독을 표현하는데, 시간을 바쳤던 ‘왕가위’는 <일대종사>를 통해, 중국과 홍콩의 근대를 정리해내며, 비로소 왕가위 작품세계 1기를 종결한다. <일대종사>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시종일관 ‘기념 사진’을 찍는 장면이 묘사되고, 그것이 ‘흑백’으로 변화되는 장면이 나온다.
왕가위에게 주어졌던 것은 고작 근대사의 ‘흑백 사진’ 몇장이었다. 창작자의 관건은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록된 사진들에서 함의를 읽어내는 것!’ 왕가위는 엽문의 흑백 사진을 통해, ‘고독한 근대인’을 읽어낼 수 있었고, 현재(<아비정전>,<중경삼림>,<타락천사>)와 미래(<2046>)를 담아내었던 시간을 지나, 드디어 <일대종사>에서 과거까지 묘사해내며, 자신의 작품세계 1기, ‘고독’을 마무리한다.
과거에는 엽문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일대종사>에서는 또 다른 일가를 이룬 장첸이 연기한 ‘일선천’ 캐릭터를 통해, 대륙에서 홍콩으로 건너 온 사람들은 무수히 있었으며, 그 선배들이 지난한 시간을 견뎌내었기에 우리에게 ‘현재의 시간’이 주어졌음을 놀라운 방식으로 증명해낸다.
그 과정에서 다소 ‘과장’이 있다하더라도,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고로 ‘무술’의 세계는 과장이 있어야 제 맛 아니던가. 그리고 그 과장을 보여주는 인물이 하물며 ‘원화평’인데. 예민한 왕가위를 견디지 못하고 숱한 촬영감독들이 떨어져나간 <일대종사> 현장에서도 묵묵히 무술연출의 일대종사로써 자리를 지킨, ‘원화평’과 그의 오랜 벗 미술감독 ‘장숙평’을 존경한다.
‘지구’라는 무수히 많은 소재를 가진 세상에서, ‘홍콩’이라는 나라를 택해, ‘세상 속 인간의 고독’을 끊임없이 묘사해 낸 그 멋진 우정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각자의 영역에서 이미 일대종사가 되어버린, ‘왕가위’, ‘원화평’, ‘장숙평’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들의 다음 작품을 몹시 기다린다. 다음 작품이 ‘고독’을 묘사해내지 않았다 한들, 한 걸음에 극장으로 달려가, 그들의 결과물을 보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을 막아서진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