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살고 있는 지금, 봉준호의 <설국열차>는 시간이 지나 23세기가 되어, ‘영화’가 지난 시대에 존재했던 과거의 미디어가 되어버린다 할지라도, ‘클래식’의 반열에 올라 기꺼이 살아남을 작품이다.
굳이 ‘극장’이나 ‘홈시어터’가 아니더라도, 인류가 계속 존재하는 한, 시간이 아무리 흐른다 할지라도 교육기관이나 학계에서 ‘체제 각성용’ 콘텐츠로 오래도록 사용되어질 수 있는 반영구적인 작품이다.
<설국열차>는 ‘인류’와 ‘체제’라는 하나의 ‘콘텐츠’에 담아내기에는 다소 벅찰 수 있는 소재와 주제를, ‘영화’라는 미디어 (그 중에서도 장르 영화의) 문법을 마스터한 우리 시대 최고의 감독 중 한명인 봉준호가 본인의 모든 재능과 열정과 통찰력을 쏟아부어 ‘마스터피스’로 탄생시킨 전무후무한 ‘체제 각성용’ 대중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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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가 흐름과 동시에 체제는 계속해서 진화를 거듭해 왔다. 돌로 사냥을 하던 원시시대부터, 스마트폰 하나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화상통화를 하고, 우주여행을 하게 된 최첨단 21세기까지, 과학이 발전한만큼 ‘체제’도 발전했다고 학습받았고, 당연히 그렇게 믿어왔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봉준호는 인류의 체제를 응축하고 상징화 한 <설국열차>를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과학의 발전만큼, 인류의 체제도 과연 발전한 것이냐고?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훼손하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자기 영역이 안전해 질때까지 일단은) 짓밟고, 자신의 영역이 지속적으로 보호받아, 자신과 가족의 의식주에 아무런 피해가 없어져야 비로소 다른 가치를 (그래야 덜 피곤하고 사회적으로 편하니까) 추구한다.
그러면서도 대자연이 가끔씩 내뿜는 ‘천재지변’이라는 분노 앞에 무력함을 느끼고, 죽음이 현실화 되어 눈앞에 닥쳐야지만, 비로소 신을 찾는다. 체제는 전혀 진화하지 않았다. 인류의 문명이 발전한만큼, ‘인간’의 종족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시대에 맞게 다른 모습으로 ‘체제’는 변화되어 온 것이다. ‘발전’이 아니라, (인간의 편의를 위해) 고작 ‘변신’을 거듭해왔던 거다.
‘인류와 체제의 관계’를 뿌리깊게 통찰한 ‘봉준호’는 장르영화의 시각적 쾌감을 통해, 감정이입할 근사한 주인공을 만들어 놓고, ‘체제각성용’ 롤러코스터에 우리를 태운다. 자 이제 롤러코스터는 출발하고, 우리는 평상시에 고민하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았던 ‘체제’의 본질을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20세기, 인류는 지구가 들썩일만큼 요란했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경험하며, 이러다간 ‘인류가 종말할 수도 있겠다’는 위기의식을 느낀다. ‘이상’적이라 여겼던, 공산주의 실험이 무참히 실패하자, 대다수의 나라들은 민주주의를 최선으로 여기며, 거기에 각종 사상을 교묘하게 서로에게 학습시키며, 인간의 종족 보존을 위한 ‘평화’작업에 들어간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 아름답게(?) 결합해, 좌/우 이념, 노동자와 자본가, 부의 분배를 통한 계급구조 등 인류가 (전쟁을 하지 않고도) 적당한 갈등을 통해, 심심치않게 시간을 보낼 것들을 만들어내며, ‘지구는 하나’라는 표어 아래,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스포츠 정신까지 부활시키며 ‘전쟁 대신 운동으로 맞짱 뜨자’고 인간을 학습시켜왔다.
그 모든 것들을 학습 받고,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정의’의 편에 서서 ‘명예’를 얻거나, 노동자의 아들이 벤처와 주식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 ‘자본가’로 위치를 탈바꿈하거나, 정치에 입문해 ‘권력’을 가지게 된다 할지라도, 우리 모두는 ‘체제’ 아래에 놓인 하나의 ‘점’일 뿐이다 라고 <설국열차>는 말한다.
‘커티스’라는 젊은 혁명가가, 자신이 존경하고 따랐던 좌파의 정신적 수장인 ‘길리엄’이, 최상위 기득권인 ‘설국열차’의 주인 ‘윌포드’와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후반부에서, ‘커티스’에 감정이입해 <설국열차>에 탑승한 관객인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우리를 구성하는 이 ‘체제’는 대체 무엇인가? 봉준호는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윌포드’의 입을 통해, ‘체제’를 친절히 알려주고는 한번 더 각성시켜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결국, 인류의 합리적인 종족 보존을 위해 이 시대에 적합하게 설계된 하나의 열차(체제)일 뿐이라는 것을.
서로 다른 칸(신분)에서 태어나, 열심히 노력해도, 고작 (체제 안에서) 기차 칸을 옮겨타는 정도의 신분 상승이라면… 열차의 가장 앞칸에 있는 사람이나, 가장 뒷칸에 탄 사람이나, 결국 체제 안에서의 하나의 ‘점’일 뿐이라면… 당신의 삶의 의미는 무엇이겠냐고 봉준호는 가볍게 잽을 날리다가, 송강호가 연기한 보안설계자 ‘남궁민수’ 캐릭터를 통해, 제3의 길도 있음을 제시한다.
바로, 체제인 ‘설국열차’에서 내리는 방법 말이다.
기득권층이 설계해 놓은 교육 방식이란, 단순히 말해 ‘체제에 가장 잘 적응하는 인간’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며, 그런 교육을 통해 성장한 우리가 체제에 적응해, 남과 비교하고 갈등하며 ‘어떤 칸’에서 시간을 보낸다 할지라도, 결국 우리는 기차 안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슬픈 존재라고 각성시킨 뒤에, <설국열차>의 보안설계자로 이러한 체제를 진작에 각성한 인간 ‘남궁민수’ 캐릭터를 통해 기차를 탈출할 수도 있는 방법을 보여준다.
체제 바깥으로 나가면, ‘얼어 죽는다’고 그들은 우리를 학습시켜 왔지만, 그 체제의 보안을 설계했던 ‘남궁민수’는 그것이 체제 유지를 위해 만들어낸 ‘거짓’이라는 것을 안다. 그가 체제에 머무는 이유는 체제 밖으로 나가서도 살 수 있을만큼 ‘체제 밖’이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 외에는 없다.
‘커티스’는 ‘기득권’의 예상을 벗어난 방법으로 ‘혁명’을 그럭저럭 성공시킨, 뜨거운 심장을 갖춘 혁명가이지만, 그 혁명이라는 것도 결국엔 ‘체제 안’에서의 하나의 흐름일 뿐이고, 그가 기득권이 된 순간, 다시금 또 다른 ‘체제’가 그 시대에 맞게끔 재편성되는 것이다. 체제의 목적은 적당한 균형을 갖춘 ‘인류의 종족 보존’과 ‘DNA 확보’이기에 그렇다고 <설국열차>는 말한다.
‘남궁민수’는 영화 속에서 이번 시대의 체제인 <설국열차>의 보안설계를 담당했기에, 체제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었고, 체제 안에서 밖으로 나갈 타이밍을 기다리며 딸과 함께 견뎌왔다. 초반에 마약중독자로 묘사되는 그도 딸에게만은 이 문제 많은 체제가 아니라, 체제 밖에서의 자유로운 세상을 선물해주고 싶은 ‘딸 바보’ 한국인 아빠였던거다. 자신의 딸만은 살인도, 험한 일도 하지 말고, ‘체제의 모래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에서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는, 보다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미래를 선물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봉준호는 <설국열차>의 후반부를 통해, 우리에게 돌직구를 날린다.
“이봐요, 우리가 이렇게 모순적인 체제 안에서 살고 있답니다. 우리끼리 이념/정치/경제/군사 문제로 백날 갈등하고, 싸우고, 다투어 봤자, 결국 우리는 체제 안에서 살다가, 허무하게 죽고 말 겁니다. 관객 여러분, 어떤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체제 안에서만 더 좋은 1등칸의 삶? 아니면 그냥 주어진 자리에서 만족하는 삶? 그것도 아니라면 체제 밖으로 나가는 삶? 전 여러분에게 체제의 진실을 재밌게 알려주며, 이걸 묻고 싶었어요.”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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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결국엔 죽는다. 아무리 장수를 해도 2세기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이 영화를 만든 봉준호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결국엔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
지식소매상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이, 실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담고 있었다면, 봉준호의 <설국열차>는 ‘인류를 통찰해 보니, 체제의 본질이 이런데, 관객 여러분은 어떤 인생을 보내실래요?’ 라고 친절하지만 강력한 질문을 날린다.
스무살이 되어 생물학적으로 어른이 된 인간이, 장수를 해서 100살까지 산다고 해도, 1년 365일, 10년 3650일, 80년 29,200일이다. 여든까지 산다고 하면 21,900일인 것이다. 결국, 스무살이 되고나면, 3만 밤을 채 못자고 우리는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세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지구 상에서 ‘죽음’을 피해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봉준호는 ‘인간으로 태어나, ‘체제 안’에서 ‘기관사’가 시키는대로 잘 적응하면, 죽기 전까지 그럭저럭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겠지만, 과연 재밌을까요? 바깥에 나가 북극곰도 보고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라고 조심스레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설국열차>가 암울하게 느껴진다면, 체제의 본질에 그만큼 적응되어 있는 것이다. 체제 안에서 인간은 100% 행복할 수 없으며, 체제 바깥으로 나간다고 행복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설국열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면, ‘체제의 점’으로 존재하며, 끊임없는 경쟁과 비교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기차 바깥으로 나가 새로운 모험을 시작하는 것은 어떠냐고, ‘체제로의 탈출’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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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 작가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통해, 1982년 개막한 ‘프로야구’가 실은 (전두환이 대중의 통치를 위해) ‘프로’라는 개념을, 사람들에게 ‘프로가 되지 않으면 끝장난다.’는 사고를 심어주려한 게 아니겠느냐고 우리에게 말했었다. 체제를 지배하는 사람들이 대중을 쉽사리 통치하고자 매스미디어를 통해, ‘프로’의 미덕을 찬양하며, 사람들을 무한경쟁의 가치관으로 몰았는데,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팀이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고,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는” (프로의 미덕에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 야구를 통해, 당시에는 만년 꼴찌팀으로 비쳤지만, 실은 (승패 따위와는 무관한) 자신들만의 야구를 완성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철학을 가진 팀이 아니었겠냐고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유년기에는, 자기가 열심히 응원하던 [삼미 슈퍼스타즈]가 승자와 패자로 나뉘는 ‘프로의 세계’에서 자꾸 패하기만 하자, 그들을 오래도록 원망했던 소설 속 주인공이 (청춘을 다바쳐 헌신했던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당한 후에서야) 체제의 본질을 뒤늦게 통찰한 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되어, 더이상 체제에 속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게 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설국열차>도,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도 23세기에도 소비되어질 각자의 영역에서 ‘고전’의 반열에 오를 문화콘텐츠라고 생각한다. ‘시대를 꿰뚫는 좋은 질문’을 던지기에 불온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예술’의 운명이라면, <설국열차>는 ‘대중 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예술의 최전선’이자, 시대가 흘러도 살아 남을 체제에 대한 ‘강력한 질문’ 그 자체다.
<설국열차>를 보고 극장에서 나오는 우리는, 나 자신도 모르게 ‘체제라는 열차’에 탑승해 있었다는 사실을 각성하게 된다. 각성과 동시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웬만하면 받고 싶지 않았던, 강력한 하나의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 체제 안에서 존재하는 나는
죽기 전까지의 시간을 대체 어떻게 보낼 것인가?”
<설국열차>에 참여한 스텝과 배우, 모두에게 경의를 표한다. 두 시간동안 ‘롤러코스터’를 탔을 뿐인데, ‘고전’의 반열에 오른 제대로 된 인문학 책을 한 권, 읽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