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토의 천국>, <제8요일>을 연출했던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의 <미스터 노바디>를 극장에서 보며, 무척이나 행복했다. 2009년에 만들어진 유럽 영화가, 2013년 10월에 한국에서 개봉한다는 것이 의아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자, 지금이라도 수입해서 개봉시켜 준 것이 진심으로 고맙게 느껴졌다.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가 [우주(를 배경으로한) 영화]들 중 ‘스탠리 큐브릭’과 맞먹을만큼 대단 했다면, ‘자코 반 도마엘’의 <미스터 노바디>는 장르와 배경의 범주에 가둘 수 없는,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어떤 면만 부각시켜서 보자면 ‘스탠리 큐브릭’을 능가하는) 압도적인 ‘작품’이었다.
인간과 세상, 그리고 예술에 대한 이해가 최고 수준에 이른 ‘거장’이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과학’ 이론을 집요하게 탐구하여 만들어 낸 경이로운 ‘걸작’이었다. [현미경]으로 ‘우주’를 통찰하고, [천체 망원경]으로 ‘세포’ 하나까지 파고드는, 말도 안 되는 ‘역설’마저 ‘진실’로 만들어버리는, ‘삶과 죽음’, ‘존재와 소멸’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루어 낸 놀라운 영화였다.
‘스토리 텔링’의 발상과 구성에 있어서, 좀처럼 어떤 ‘형식’에 인물과 이야기를 가두지 않고, 종횡무진 [시공간]을 초월하여, 탁월하게 범우주적인 통찰을 해내는데, 그렇다고 ‘비주얼’이 후지냐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싶어질 만큼, 올해 본 영화 중, 이만한 ‘촬영’과 ‘프로덕션 디자인’, ‘후반 작업’ 솜씨를 갖춘 작품은 손에 꼽힐 정도일만큼 최고 수준의 만듦새였다.
영화는 활자로 표현된 설계도인 ‘시나리오’가 영상으로 시각화되는 과정에서 상당한 ‘자본’이 필수적으로 발생하는 매체다. 따라서, 자본의 도움 없이는 원하는 그림을 만들어낼 수 없는 ‘창작자’ 입장에서는 슬픈 매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뛰어난 ‘통찰력’과 ‘상상력’을 갖춰도, 한 ‘개인’이 동원할 수 있는 ‘자본’이란 한계가 있으며, 필연적으로 타인에게 ‘투자’를 받는 과정이 존재하고, 투자를 받는 대가로 ‘창작의 헤게모니’가 일정 부분 자본가에게 넘어가게 된다.
그런데 <미스터 노바디>는 ‘자코 반 도마엘’이라는 검증된 거장이, 창작을 함에 있어서, ‘자본’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 작품이다.
소설을 하나 써보자면, ‘도마엘’ 감독을 좋아하는 예술적 안목을 갖춘 두바이의 ‘자본가’가 “아이고, 거장 형님, <토토의 천국>, <제8요일>같은 걸작을 만들고도 왜 10년 넘게 영화도 안 만들고 그러세요?”라고 어느 날 ‘도마엘’을 만나 묻는다. ‘도마엘’은 “제가 지금 상상하는 것을 영화로 표현하려면 천문학적인 돈이 들 거예요. ‘상업적인 메리트’가 있는 작품이 전혀 아니거든요. 7년 동안 작업한 시나리오가 있긴 한데, 정신 나간 자본가가 아니면, 이 작품에 돈을 대지 않을 겁니다.”라고 푸념 섞인 대답을 한다. 두바이 자본가 왈 “제가 그 정신 나간 자본가입니다. 돈은 신경 쓰지 마시고, 형님이 원하시는 대로 작품 마음껏 만들어 보세요! 어차피 석유 좀 팔면 되니까요.”
…왠지 이렇게 해서, ‘자본’에 구애받지 않고 영화 한편을 만들게 된 ‘예술적 야심’을 갖춘 거장 감독 ‘자코 반 도마엘’이, 죽기 전에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와 쌍벽을 이루는 필생의 역작을 만들겠다는 각오로, 피똥 싸며 만들어 낸 듯 보이는 작품이 바로, <미스터 노바디>다.
우리네 삶은 슬프게도 모든 영역에서, ‘자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는데 <미스터 노바디>에서는 정작 ‘자본’에 대한 탐구는 빠져있다. 영화의 배경은 2092년, 무려 118살의 노인 ‘니모’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작품의 세계관과 그것을 묘사하는 방식, 인물들을 엮어 구성해나가는 솜씨가 ‘경천동지’할 지경이다. ‘인간’을 하나의 ‘존재’로써 바라보며, 선사시대부터 화성으로의 여행이 가능해진 미래까지 사유하며, 자신의 방식으로 ‘세계’를 통찰해 낸 거장은, ‘자본’은 ‘인간’의 행복을 이루는 구성요소 중 ‘비본질’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자코 반 도마엘’은 인간을 언젠가는 ‘소멸’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써 바라보며, 어떤 삶을 살아가던지, 그것은 모두 옳은 길이라고 자신의 작품인 <미스터 노바디>를 통해서 소신껏 발언한다. ‘나’라는 존재가 하나의 선택을 할 때, 또 다른 [시공간]에서는 다른 선택을 한, 나이지만 내가 아닌 ‘또 다른 나’가 존재한다.
그러니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우린 결국 ‘소멸’한다는 명제는 변하지 않으니, 자신이 선택한 삶이라면 ‘그때 이랬다면 어땠을까’ 후회하지 말고, 주어진 ‘지금, 여기’에 집중해서 진짜 원하는 것을 하면서, 즐겁게 살라고 말해준다.
<미스터 노바디>의 스토리텔링 방식은 <토토의 천국>과 골격은 얼핏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18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자코 반 도마엘’의 사유의 폭과 깊이는 ‘범우주적’으로 확장되었고, 발상의 경계를 허문 진정한 아티스트 ‘살바도르 달리’가 무덤에서 살아 돌아와 연출한 듯, 인간의 ‘상상력’을 억압하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마지막 장면’까지 용기 있게 내달린다.
<미스터 노바디>를 보는 내내, 시나리오 작업에만 ‘7년’이 걸렸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느낄 정도로, ‘이야기’와 ‘구성’이 탄탄했고, DOP, 프로덕션 디자이너, 음악감독, 후반작업 아티스트 등 각 분야 당대 최고 수준의 크리에이터들과 협력하며 최상의 ‘결과물’이 탄생한 것 같다고 느꼈다. 단 한 컷, 그 어떤 장면도 후지지 않고, 울림 있는 음악이 시의적절하게 흐르며, 영화 곳곳의 작은 소품조차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감각적인 ‘프로덕션 디자인’과 섬세한 ‘후반작업’을 통해 구현된 ‘미래 세계’는 감탄이 절로 나오게끔 했다. 거기에다, 심지어 ‘편집’까지 잘했다. 한마디로 웬만한 젊은 대가들의 작품은 중, 고등학생이 만든 영화로 보이게 할 만큼 <미스터 노바디>는 압도적인 ‘걸작’이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작품이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다. 2009년 작품인데, 4년이 지난 지금 뒤늦게 국내에서 개봉 중이라 찾아봤더니, <토토의 천국>을 연출한 ‘자코 반 도마엘’의 작품이었고,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바로 예매한 뒤에 달려가서 감상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 숙성시킨 거장의 사유가 낳은, 끝내주는 세계를 감상하며, 정말이지 행복함을 느꼈다.
솜씨 좋은 ‘큐레이터’가 잘 건축된 미술관에서 꼼꼼하고 수준 높은 전시를 해놓았을 때 만족하며 [전시회]를 감상할 때의 느낌이나, 애써 이것저것 준비하며 비행기 티켓을 끊고, 다른 문화권의 신세계를 경험할 때의 느낌을, 단 돈 몇천 원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뒤늦게라도 이 영화를 수입해 준 영화사가 정말 고맙게 느껴졌다.
영화 속 대사처럼, ‘사후세계’가 존재하는지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주의 끝도, 다른 차원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확실한 건, 인간은 어떤 삶을 살든지, 결국엔 죽게 된다는 거다. 적어도 지구에서의 ‘소멸’이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이고, 그 ‘죽음’이라는 소멸의 과정까지, ‘시간’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바꿔 말해, ‘인생’이란 소멸하기까지 스스로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하는 문제이고, 그 과정에서 각자의 ‘선택’이 존재할 것이다. <미스터 노바디>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일정 부분 참고할 수 있는 ‘팁’을 제공한다.
‘자코 반 도마엘’이라는 영화 거장과 동시대에 살며, 그의 작품을 보고, 삶에 적용시킬 수 있는 힌트를 얻는다는 것이 감사하다. ‘자본주의’ 사회라, 생존하기 위해서는 의식주를 지켜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수입’을 위한 노동과 고민은 필수적이고 계속 해나가야겠지만, 가끔씩은 그런 문제에서 벗어나, ‘거장의 사유세계’를 통해, 나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환기시키고 싶다.
<미스터 노바디>는 ‘영화 관람’이라는 행위를 통해, 그런 환기를 최고 수준으로 시켜주는 작품이다. 온 맘 다해, 강력히 추천한다!